빌 헤이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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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더들리 "빅 빌" 헤이우드(William Dudley "Big Bill" Haywood, 1869년 2월 4일 ~ 1928년 5월 18일)는 미국의 노동운동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발기인 중 한 명이었으며, 미국 사회당 집행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었다. 20세기의 첫 20년간 헤이우드는 콜로라도 노동전쟁, 로렌스 직물 파업을 비롯한 여러 중요한 노동쟁의에 관여했다.

헤이우드는 특정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는 직장이나 직종, 숙련도에 상관없이 하나의 노조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산별노조 사상의 옹호자였다.[1] 이는 당대에 널리 퍼져있던 직종별 노동조합(AFL 등)과 대조되는 사상이다.[2] 또 헤이우드는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가 단결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많은 노조에서 충돌을 빚었다.[3] 헤이우드는 정치적 전술보다 직접행동을 선호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생디칼리스트였다. 이 때문에 1912년 사회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헤이우드 제명사건으로 사회당은 두쪽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총선에서 참패하는 곡절을 겪는다. 사회당 집행위는 1913년 헤이우드를 다시 불러들였다.[4]

폭력적 분규에 나서는 데 망설임이 없었기에,[4] 헤이우드는 공안기관의 주요 목표물이 되었다. 1907년 프랭크 스투넨버그 주지사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건(무혐의로 풀려남)은 국가적 관심거리가 되었다. 제1차 적색공포 기간이던 1918년, 헤이우드는 1917년 간첩법을 위반한 혐의로 다른 IWW 조합원 10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1년 상고 진행을 위해 구치소에서 나온 틈을 타 헤이우드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도피했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5]

생애

초기 생애

윌리엄 더들리 헤이우드는 1869년 유타 준주 솔트레이크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랑말 속달우편 배달부였는데, 헤이우드가 3세일 때 폐렴으로 죽었다.[6] 9세 때 헤이우드는 나이프로 새총을 깎아 만들다가 오른쪽 눈을 다쳤고, 오른눈을 영구히 실명했다. 헤이우드는 살면서 한 번도 실명된 오른눈을 의안으로 갈아낀 적이 없다. 사진을 촬영할 때면 머리를 돌려 얼굴의 왼쪽만 찍히도록 했다. 같은 해, 헤이우드는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잠깐동안 카우보이자영농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896년 광업으로 복귀했다.[1] 1877-78년의 몰리 맥과이어스 사법살인,[7] 1886년의 헤이마켓 학살, 1894년의 풀먼사 파업을 거치면서 어른이 된 헤이우드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6]

서부광부연맹

1896년, 서부광부연맹(WFM) 총재 에드 보이스아이다호의 은광에서 연설을 했는데, 헤이우드는 이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다.[6] 보이스의 연설에 감화된 헤이우드는 WFM 조합원으로 가입함으로써 미국 노동사의 물결에 첫 발을 담그게 된다.

헤이우드는 가입한 즉시 WFM의 열성분자가 되었으며, 1900년에는 총집행위 위원이 된다. 1902년에는 WFM 회계간사가 되었는데, 이는 총재 찰스 모이어 바로 다음가는 2인자 자리였다. 같은 해, WFM은 크리플크리크 광산지구를 둘러싸고 몇 년 간 지속된 콜로라도 노동전쟁에 개입했다. 이 분쟁의 결과 노조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막론하고 33명의 노동자가 숨졌다.[6] WFM은 가혹한 노동환경과 쥐꼬리만한 임금에 고통받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조합의 이익이 확대되도록 하기 위한 일련의 파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은 실패했고, 그 결과 헤이우드는 노동계급의 노동쟁의에 대한 더욱 넓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산업 라인에 따라 조직되는 단일거대노조의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1]

세계산업노동자연맹

1904년 말, 노동계 급진파의 두드러진 인물 여럿이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새로운 혁명적 노조를 만들기 위한 회동을 가졌다.[8] 선언문이 작성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이 선언문에 동의한 노동운동가들이 새로운 노조를 창설하는 대회에 참여하기로 함으로써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발족했다.

1905년 6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헤이우드는 시카고 브랜드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9] 미국 전역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광부, 노동조합 운동가, 반체제적 노동자 등의 단체들에서 골라 보낸 대표자들 200명이 청중이었다. 헤이우드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제1차 세계산업노동자연맹 대회를 개회했다.[9]

노동자 동지 여러분, 이것은 노동계급의 대륙회의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노예의 굴레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시키기 위한 목적의 노동계급 운동 하에 노동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본 단체의 목적과 목표는 노동계급이 경제적 권력, 삶의 의미, 생산 및 분배에 사용되는 기계 제어 권한을 자본가 주인님들과는 무관하게 획득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헤이우드 외에 대회에서 연설한 이로는 미국 사회당 당수 유진 데브스, 전미광산노동자연합의 노동조직가 메리 해리스 "마더" 존스가 있었다.[9] 발족한 이후 IWW는 공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살인 혐의 재판

재판 피고들인 찰스 모이어, 빌 헤이우드, 조지 프티본의 사진. 1907년 촬영.

1905년 12월 30일, 전 아이다호 주지사 프랭크 스투넨버그칼드웰 시에 소재한 자택 앞에서 폭탄살해를 당했다. 스투넨버그는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WFM과 여러 번 충돌했었다. WFM 총재 찰스 모이어의 경호원이었던 전 WFM 조합원 해리 오차드[10] 가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그가 묵고 있던 여관 방에서 증거가 발견되었다.[11] 핑커톤 소속 유명 사립탐정 제임스 맥파를랜드가 수사를 맡게 되었다. 맥파를랜드는 몰리 맥과이어스에 프락치로 침투하여 그 조직을 파괴시킨 혁혁한 전과가 있었다.[12]

재판도 하기도 전에 맥파를랜드는 오차드를 보이스 감화소에 사형수로 집어넣고 식사 배급을 제한하며 삼엄하게 감시했다. 맥파를랜드는 수사 준비를 마친 뒤 오차드를 만나 호화로운 점심식사를 하고 여송연을 피게 해 주었다.[13] 이 핑커톤 탐정은 오차드에게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은 WFM 지도부를 이 일에 연루시키는 것이고, 그러지 아니하면 즉결 교수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을러댔다.[14] 교수형으로 협박한 뒤 맥파를랜드는 식사, 담배, 보다 좋은 처우를 약속하고, 오차드가 협조한다면 어쩌면 풀어줄 수도 있고 심지어 재정적 보상도 받을 수 있으리라 꼬드겼다.[15] 그 결과 탐정양반은 피의자에게서 최소 17건 이상의 모살을 포함한 여러 범죄 64페이지 분량의 자백서를 받아냈다.[16]

맥파를랜드는 오차드의 위증 자백서를 이용해 WFM 지도부가 슈토넨버그 모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17] 그리고 주 경계를 넘어 콜로라도 주 덴버 시에서 헤이우드, 모이어, 조지 프티본 3인을 체포했다.[6] 1906년 2월 17일, 맥파를랜드는 3인을 특수 열차에 태워 덴버 시법원이 개입하기 전에 아이다호로 빼돌렸다.[18] 작가 피터 칼슨(Peter Carlson)은 이 과정을 "납치 계획"이라고 불렀다.[17] 이 유괴행위는 너무 터무니없어서 WFM과 전혀 사이가 좋지 않은 미국노총(AFL) 총재 새뮤얼 곰퍼스가 자기 조직에 변호를 위한 기금을 모을 것을 지시했을 정도였다.[19] 대법원에 청원한 인신보호는 기각되었다. 이에 반대한 사람은 조지프 맥케나 대법관 뿐이었다.[20]

헤이우드의 재판은 1907년 5월 9일에 시작되었다. 시카고의 유명한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가 변호인으로 나섰다. 정부측은 오차드의 자백 외에는 다른 증거가 없었고,[21] 대로는 오차드의 과거를 확인하여 그에게 폭력적 전과가 이미 있었음을 밝혀냈다. 다만 대로는 오차드에 대한 대질신문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6] 재판 도중 오차드는 자신이 광산소유주협회에 돈을 받은 정보원으로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으며,[22] 핑커톤 사립탐정들에게 돈을 받았고, 모이어나 헤이우드를 만나기 전에도 광산쟁의에서 폭발물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자백했다.[23] 대로의 최종 변론 이후(많은 방청인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6] 배심원단은 헤이우드가 무혐의라고 선고했다. 뒤이은 조지 프티본의 재판에서도 대로는 재판이 질질 끌리기 전에 오차드와의 대질로 강력한 변호를 이끌어냈으며, 이후 덴버의 오린 힐튼에게 변호를 넘겼다.[24] 두 번째 배심원단이 프티본도 무혐의라고 선고하자 모이어에 대한 기소는 아예 취하되었다.

이 일로 헤이우드는 급진적 이념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유진 데브스는 헤이우드를 “노동의 링컨”이라고 불렀다.[25] 파란만장한 과거와 외모에 자본주의에 대한 직설적인 발언들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자본가는 심장이 없다. 대신 돈지갑에 작살질을 하면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다.”[26] 또 한번은 연설 모두발언에서 이런 말도 했다. “오늘밤 저는 계급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법조인마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꾸밈없이 이야기할 것입니다.”[27] 물론 헤이우드의 과장스러운 언동의 재능은 위험하기도 했다. 신문들은 그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파업에 참여한 IWW 조합원 전체에 대한 체포를 정당화했다. 헤이우드가 자주 하던 말로는 이런 말도 있다. “강탈(Confiscate)이라! 그것은 좋은 것이다! 나는 이 낱말이 좋다. 이 낱말은 자본가를 벗겨먹음을, 그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온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 빼앗음을 위해서는 상당한 힘이 있어야 한다.”[28]

로렌스 직물 파업

헤이우드는 산별노조 원리에 대한 대중적 소개서를 1911년 찰스 H. 커 출판회사를 통해 발행했다.

빌 헤이우드가 WFM을 떠나 IWW를 조직하고 있을 때쯤 메사추세츠 주 로렌스 시에서 그 유명한 로렌스 직물 파업이 터져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12년 1월 11일, 로렌스 시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여 일손을 놓았다. 1주일 만에 2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IWW는 이미 로렌스 현지에서 활동하며 파업 지도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은 경찰을 부르는 것으로 응답했고, 파업은 급격히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현지의 IWW 지도자 조지프 에토르아르투로 지오바니티가 파업에 참여한 여공 안나 로피조에 대한 모살 혐의로 구금되었다.[29] 그러나 그녀가 경찰 발포에 의해 사망했음을[30] 확인한 목격자가 열아홉 명이나 있었다.[31]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헤이우드를 비롯한 조직가들이 로렌스로 내려가서 파업을 맡기로 했다. 이후 수 주에 걸쳐 헤이우드는 파업의 여러 전술적 결정사항들을 지휘 또는 승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전술은 파업 노동자들의 굶주린 아이들을 뉴욕과 버몬트로 보내서 동정을 유발하자는 것이었다.

유럽의 노동자들이 장기 파업에서 이 전술을 사용했음을 알게 된 헤이우드는 로렌스에서 미국 노동사 최초로 도박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헤이우드와 IWW는 사회주의 신문들의 지면을 통해 많은 가정들에게 탄원했고, 낯선 이들에게 자기 아이들을 맡길 파업 노동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걸러졌다. 1912년 2월 10일, “로렌스 파업 아동들”의 첫 그룹이 부모에게 눈물의 작별을 하고 여성 보호자의 인솔에 따라 뉴욕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아이들은 저녁에 맨해탄에 무사히 도착했고 노동회관으로 옮겨졌다. 아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이 제공되었고 이후 7주에 걸쳐 뉴욕에 머물렀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대우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렌스 시 및 그 외 지자체 공무원들은 이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로렌스 시장 마이클 스캐늘런(Michael Scanl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업 지도부가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로렌스 시는 이 아이들에게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32] 언론지상에서 이 어린이 엑소더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대중들 사이에 로렌스 시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경찰과 시장은 처음보다 작은 규모의 어린이 대표단이 한두 번 더 떠날 수 있게 했지만, 그러면서 뒤로는 탄압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월 24일, 파업노동자들이 또다시 아이들을 보내려는 것을 경찰이 덮쳤다. 혼전이 벌어졌고,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로 분리되었다. 경찰은 사람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가했고, 파업노동자 및 그 자식들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국가적 분노가 일었다. 《뉴욕 월드》 지는 “로렌스 시 당국은 눈이 멀었으며 공장주들은 미쳤음이 틀림없다”고 썼다.[33] 《뉴욕 트리뷴》 지는 경찰의 대응을 “파업을 철회시키기 위한 협상이 가능했던 상황에서 그 무능을 드러내준 멍청한 짓”이라고 했다.[33] 사태는 미국 의회로 올라갔고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귀에까지 닿게 되었다. 전 국민적 압박이 공장주들에게 노동자들에게 협조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3월 12일, 공장주들이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에 동의함으로써 파업은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그러나 헤이우드와 IWW가 로렌스 시에서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업이 끝나기는 했지만 에토르와 지오바니티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다. 헤이우드는 시 당국에게 “감옥문을 열지 않으면 공장문을 닫게 될 것이다”며 다시 파업이 있을 수 있다고 협박했다. 여러 법률지원과 9월 30일에 실시된 하루짜리 파업에도 불구, 기소는 취하되지 않았다. 헤이우드는 파업 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피소되었다. 이는 헤이우드가 로렌스 시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고, 그 결과 헤이우드는 보스턴 커먼에서 체포당한다. 에토르와 지오바니티는 11월 26일 무혐의로 풀려났다. 두 사람의 석방은 대규모의 대중적 지지가 뒷받침된 결과로 생각된다.[34]

미국 사회당

헤이우드는 오랫동안 미국 사회당의 열성당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사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19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진 데브스의 선거운동에 참여하여 데브스와 함께 열차를 타고 전 국토를 돌아다니기도 했다.[4] 또한 1910년에는 국제사회주의 운동 조직 제2인터내셔널에 미국 사회당 대표로 보내졌다.[4] 1912년, 헤이우드는 사회당 전국집행위 위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임금제도 철폐와 자본주의 전복에 관한 헤이우드와 IWW의 급진성은 사회당의 보다 온건한 의회정치 지향 사회주의자들과의 사이에 긴장을 발생시켰다. 헤이우드와 IWW는 정치적 전술보다는 직접행동과 파업을 선호했으며, 이는 대부분 폭력사태로 이어졌다.[35] 헤이우드가 뉴욕 시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앞으로 자신은 노동자들의 투표권 행사를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직접행동 전술을 선호한다고 밝히자 사회당 뉴욕주당 주집행위는 전국집행위에 헤이우드의 퇴진을 요구했다.[36] 1913년 2월, 2대 1을 넘어서는 비율로 헤이우드의 제명안이 통과되었다.[36] 당내 투쟁에서 패배한 헤이우드는 사회당의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IWW의 수천 조합원과 그 지지자들에게 합류했다.[35]

기타 노동운동

1913년, 헤이우드는 패터슨 견직 파업에 참여한다. 이 파업으로 헤이우드를 비롯한 1,850여명의 파업 참여자가 체포당했다. 오랜 저항과 기금 조성 활동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1913년 1월 28일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IWW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치 자신들이 견직공장 노동자들인 것처럼 꾸미고 패터슨에서 하는 것처럼 파업을 재현하자 헤이우드는 또다시 신문지상에 올랐다. 헤이우드는 진보운동가 사이에 유명세를 얻었고, 마벨 다지 루한 부인의 지식인 살롱에 빈번히 드나들게 되었다. 특유의 스테트슨 모자를 쓰고 살롱에 든 헤이우드는 그곳에서 아방가르드 작가 및 예술가들을 사귀었다.

간첩 혐의 재판

헤이우드와 IWW는 노동쟁의를 하면서 정부와 계속 충돌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미국 연방정부가 눈엣가시 같았던 헤이우드와 IWW를 손봐줄 좋은 기회가 되었다.[37] 1917년 9월 5일, 법무부는 새로이 통과된 1917년 간첩법을 적용하여 전국의 IWW 지부 48개소에 들이닥쳤다.[35] 법무부는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재가를 받아 IWW 조합원 165명을 “징집방해 및 탈영조장 음모, 노동쟁의와 관련해 사람들을 위협” 혐의로 체포한다.[37]

1918년 4월, 체포된 IWW 조합원들 중 헤이우드 외 100명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배석판사는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였다. 재판은 5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이는 당대 최장기간 지속된 형사재판이었다. 그러나 그 긴 기간 동안 헤이우드 본인이 증언한 시간은 단 3일밖에 없었다.[37] 피고 101명 전원에게 유죄가 확정되었고, 헤이우드 외 14명에게는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지지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헤이우드는 유죄 선고를 뒤집을 수 없었다. 1921년, 헤이우드는 상고를 위한 보석 기간 중에 잠적하여 러시아로 도피했다.[38] IWW 관계자들은 헤이우드의 도피를 전혀 몰랐으며 오히려 깜짝 놀랐다. 헤이우드의 변호인은 “노동계가 헤이우드가 정말 도망칠까 우려했다면 그는 할복이라도 했을 것”이라며, “헤이우드는 IWW 및 모든 지지자들과 절연될 것”을 선언했다.[38] 백만장자 지지자 윌리엄 브로스 로이드가 기부한 미화 15,000 불 상당의 채권은 헤이우드의 도피로 인해 그대로 몰수되었다.[38]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여생

왼쪽부터 윌리엄 샤토프, 헤이우드, 그레고리 안드레이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건너간 헤이우드는 레닌볼셰비키 정부의 노동자문관이 되었으며,[6] 1923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또 쿠즈바스 자율산업단지의 개발에도 참여했다.[39] 모스크바에 소재한 헤이우드의 작은 아파트를 방문한 여러 사람들은 헤이우드가 외롭고 우울해 보였으며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회상했다.[40][41][42] 1926년 헤이우드는 러시아 여자와 결혼했으나 부부는 서로의 모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고 수화로 의사소통했다.[5]

Plaque on a brick wall with inscription: William D. Haywood/Вильям Д. Хейвуд, 1869-02-04–1928-05-18
크레믈린 벽에 붙은 헤이우드의 매장 명판

1928년 5월 18일, 헤이우드가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죽었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과 당뇨로 인한 뇌졸중이었다.[43][44] 시신을 화장해 뼛가루의 절반은 크렘린 벽에 매장했고 나머지 절반은 유골함에 담아 시카고로 보내 헤이마켓 희생자 위령비 근처에 매장했다.[6]

헤이우드의 노동철학

산업별 노동조합

혁명적 윤리 명령

인종을 초월한 노동자 연합

저서

각주

  1. "New Perspectives on the West – William "Big Bill" Haywood," PBS Interactive, 2001. Retrieved March 20, 2006.
  2. William Cahn, A Pictorial History of American Labor. New York: Crown Publishers, 1972; pp. 137, 169.
  3. 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Revised and Updated. New York: HarperCollins, 2009; pp. 337–339.
  4. Sam Dolgoff, "Revolutionary Tendencies in American Labor – Part 2," The American Labor Movement: A New Beginning. Resurgence.
  5. "Big Bill Haywood Weds. Can't Speak Russian and Russian Wife Can't Speak English," New York Times, January 14, 1927.
  6. Douglas Linder, "The Trial of Bill Haywood," Famous Trials, 1998.
  7. Willam D. 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66; pg. 59.
  8. For an official account, see: Vincent St. John, The IWW: its History, Structure and Methods. Chicago: IWW Publishing Bureau, 1917.
  9.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pp. 329–330.
  10. 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158.
  11. Peter Carlson, Roughneck: The Life and Times of Big Bill Haywood. New York: W.W. Norton, 1983; pg. 87.
  12. Carlson, Roughneck, pg. 88.
  13. Carlson, Roughneck, pg. 89.
  14. Carlson, Roughneck, pg. 90.
  15. Carlson, Roughneck, pp. 89–91.
  16. Carlson, Roughneck, pg. 91.
  17. Carlson, Roughneck, pg. 93.
  18. Carlson, Roughneck, pp. 93–94.
  19. Carlson, Roughneck, pg. 97.
  20. Carlson, Roughneck, pg. 101.
  21. Carlson, Roughneck, pg. 107.
  22. Carlson, Roughneck, pg. 119.
  23. Carlson, Roughneck, pg. 138.
  24. Clarence Darrow: Attorney for the Damned - 구글 도서
  25. Bruce Watson, Bread and Roses: Mills, Migrants, and The Struggle for the American Dream. New York: Viking-Penguin, 2005; pg. 92.
  26. Watson, Bread and Roses, pg. 93.
  27. Watson, Bread and Roses, pg. 95.
  28. Watson, Bread and Roses, pg. 96.
  29. Fred W. Thompson, The IWW: Its First Seventy Years 1905–1975.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1976; pg. 56.
  30. Carlson, Roughneck, pg. 166.
  31. 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249.
  32. Watson, Bread and Roses, pp. 145–146.
  33. Watson, Bread and Roses, pg. 175.
  34. “10,000 Hail Ettor and Comrades Free; Enthusiastically Pledge Fealty to 'One Religion, Working Class Solidarity.' (PDF). 《New York Times》. 1912년 11월 27일. 1면. 2010년 11월 11일에 확인함. 
  35. Harry Siitonen, "The IWW: Its First 100 Years,"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March 2005.
  36. "Result of Referendum D, 1912: Vote Closed February 26 [1913]," Cleveland Socialist, vol. 2, whole no. 73 (March 15, 1913), pg. 4.
  37.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pp. 372–373.
  38. "Haywood in Russia as Sentence Begins," New York Times, April 22, 1921, pg. 14.
  39. “The Autonomous Industrial Colony "Kuzbass". Flag.blackened.net. 2013년 6월 4일에 확인함. 
  40. Dreiser, Theodore, Dreiser Looks At Russia, Horace Liveright (1928)
  41. Thomas Stressguth, Legendary Labor Leaders. Oliver Press, 1998; pg. 61.
  42. Kevin J. Christiano, "Religion and Radical Labor Unionism: American States in 1920s," Journal fo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vol. 27, no. 3 (1988), pp. 378–388.
  43. 'Soviet State Funeral Is Likely for IWW Leader, Who Was Fugitive From Here. Nihilist to Some, Martyr to Others, He Knew Many Jails From Steunenberg Trial Onward," New York Times, May 19, 1928.
  44. Eric Foner and J. Garraty, The Reader's Companion to American History. Boston: Houghton Mifflin Books, 1991; pg. 496.

외부 링크